- 윤영자
하루 치의 마른 햇살 다 밀어낸 오후
복사꽃 떨어진 자리에
어머니의 그늘이 쌓여 있다
가끔 눈부신 기억이 다른 길을 막기도 했지만
단물이 물씬물씬 흐를 때쯤이면
밖으로 빙빙 돌던 아버지는 고추잠자리처럼 돌아와
수밀도 껍질을 훌러덩 벗기곤 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떠났어도 원망은 커녕
먹음직스럽게 무르기를 기다렸다
어머니는 내가 눈치챌까
그때마다 오히려 아버지를 두둔했다
‘사람 사는 게 꽃 지듯’하는 거라며
혼잣말처럼 자위하며 장독대를 빙빙 돌았다
슬프도록 눈부시게 핀
복사꽃 입술이 오므라져
더 두터워졌지만
복숭아 벌레 한 마리 자궁 속으로 들어앉았다
나는 날짜변경선을 따라 둥글어지고
쉽게 손 타지 못하도록 까슬까슬한 털을 밀어 올렸다
가지마다 휘어지게 보름달은 뜨고
몸의 신열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뺨 붉은 저 달, 땅으로 떨어질까
지상의 여름이 두근거렸다
씨방 안에 고여 들어 아득한 은하를 지나온 후
한세상 불안을 감춘 복사꽃은 다시 피어
기록되는 꽃의 족적
내가 무르익듯 초경은 삼복더위를 지났다
1943년 서울 출생
2012년 《문학이후》 수필 등단
2015년 월간 《신문예》 등단
백교문학상 시 우수상
안산시 문예진흥기금 수혜
시집 『구름 한 잔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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